Chapter 96

97화. 호랑이 굴로

박민정과 엑스엑스는 본격적으로 투자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척척 잘 진행되고 있는 걸로 보아 최규식의 작품이 잘 먹힐 만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최규식이 직접 나서 그쪽 사람들에게 알아본 결과 캐스팅도 주연급은 다 정해졌다고 했다.

최규식의 원고에 주연 후보만 따로 정리된 부분이 있었는데, 그대로 가는 걸로 보아 최대한 수정을 적게 하려는 의도 같다고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최규식의 원고인데.

박민정이 손대면 댈수록 열화일 것이다.

어쨌든 잘 진행되고 있다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놓치지 않고 잘 빼앗아 오기만 하면 된다.

원작자인 데다가 감독으로까지 유명한 최규식이 들어간다고 하면 오히려 더 좋아하겠지.

〈아란국시〉와 안나의 〈K-힙합스타〉도 촬영에 들어갔다.

나영환은 아쉬워했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출연하는 것보다는 아란 한 명에게 집중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안나가 그동안 생각날 때마다 적어둔 가사를 다 가져다 쓰면 필리버스터도 가능할 정도의 분량이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안나가 자신을 디스하는 래퍼에게 ‘Yeah I’m f**king idol. But your rapping is f**kin’ fake yo~.’라고 쏘아붙이는 모습이 예고편에 공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언더에서는 필기 래퍼의 재림이라며 엄청난 기대를 보내 주고 있기도 했다.

나는 관리를 진희에게 맡긴 후 바로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샀다.

업그레이드 미션 문자가 예견하고 있는 11월 16일에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다.

내가 미국으로 가는 데엔 이유가 있다.

업그레이드 미션을 성공시켜야 하는데, 구해야 하는 인물은 브랜든 파커다.

브랜든 파커는 근육이 많은 백인 남자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액션배우다.

총도 쏘고, 스팸 영상에서처럼 차를 불태우기도 하는 역할 전문인 것이다.

그런 브랜든 파커를 구하는 게 미션이라면 미국으로 가는 게 옳았다.

촬영 중인 영화의 제목은 〈광란의 질주〉였다.

뜻밖에 박광철에게서 알아낼 수 있었다.

영상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OST에서 ‘레브잇크’라는 미국 유명 래퍼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광철에게 전화를 해 봤다.

박광철의 말에 의하면 그 가수가 〈광란의 질주〉라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메인 삽입곡 제작을 맡았다고 했다.

지난번 위문열차를 제안했을 때 곡 제작이 다 끝나 있는 상태였다고.

업그레이드 미션이 ‘거대 유성 뽀개기’ 같은 게 아닌 이상 성공시킬 수밖에 없다.

지난번엔 박광철을 구하는 게 미션이었다면 이번은 브랜든 파커를 구하는 게 미션이다.

둘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구하라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박광철을 구하는 것보다는 쉬울 거라는 생각이다.

그냥 그 차만 안 타게 만들면 되니까 말이다.

***

미국 존 케네디 공항에 도착해 내려 물품보관소 먼저 들렀다.

체브로렛 홍보팀 직원에게 전달받은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스타리우스 차키 세 개가 나왔다.

낭낭하게 넣어 달라고는 했지만 이 정도면 축구팀을 운영해도 될 수준이다.

주차장으로 나오자 번호판이 연속된 스타리우스가 한쪽에 깔 별로 주차되어 있었다.

검정색, 회색, 흰색이었다.

남자라면 무조건 블랙이었으므로, 흰색 스타리우스에 탑승했다.

검정색은 아껴 두어야 한다.

남자다워지기 위한 기회로?

그렇지 않다.

브랜든 워커의 그 씬을 막기 위한 방법을 아직 고안해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배우의 몸값은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미션에서는 브랜든 파커와 ‘동료들’을 구하라고 했다.

아마 그 동료들도 유명 배우일 게 뻔하다.

그들에게 가서 정당한 사유도 없이 오늘치 장면을 찍지 맙시다! 라고 외친다면…….

그래서 실제로 촬영이 연기된다면 제작사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웬만해선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란 뜻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영상 속 블랙 스타리우스와 똑같은 저 차량을 가져다 들이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스타리우스를 천천히 몰아 탤런트 홀딩스에 도착했다.

안 그럴 줄 알면서도 갑자기 브레이크가 빠져 버릴까 불안하기도 했다.

물론 그 불안 때문에 차를 천천히 몬 건 아니다.

쓸데없이 오른쪽에 위치한 운전석 때문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해두자.

“미국에서 뵈니까 너무 반갑네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행차’ 미국에 방문하겠다고 했더니 박광철이 나서서 숙소를 봐 주겠다고 했다.

자신의 회사 근처에 알아봐 줄 수 있다고.

그걸 원하긴 했는데 실제로 제공받으니 아주 감개무량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박광철이 실내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일단 이곳 분위기 먼저 봐 두고, 자연스럽게 〈광란의 질주〉 촬영팀도 소개를 받아 볼 생각이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친분이 없으면 촬영을 방해하는 동양인 괴한 작전밖엔 시도해 볼 수 없다.

“여기 마침 가수들이 모여 있는데. 잠깐 만나 보실래요?”

“네? 아, 아뇨. 굳이 안 그래도.”

“일단 들어오시죠.”

가수들이랑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럼 괜히 사인을 받아야 할 것 같고.

귀찮지 않은가?

나는 제작사와만 연결되면 바로 뛰쳐나갈 생각이었지만 박광철은 막무가내로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가수들이 모인 장소에 도착했다.

뭘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꽤 중요한 일로 모여들 있는 거였겠지.

이름은 몰라도 얼굴만큼은 아는 인물들이 한 바구니였다.

그 중엔 빌리 애런도 있었고, 레브잇크도 있었다.

빌리 애런은 반갑다는 듯 레브잇크를 툭툭 치며 ‘마라락, 마라락’s boss’라고 했다.

“Ohhh~. Yo I’m f**king idol~.”

그도 안나의 예고편을 봤는지 안나의 랩을 그대로 따라 하며 내게 하이파이브를 권했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가벼운 포옹을 해오기도 했다.

안나를 아시느냐고 묻자 그가 신나게 흥얼거리듯 답변했다.

대충 빌리는 안나의 베프고, 자신은 빌리의 베프인데, 베프의 베프는 베프나 마찬가지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내가 영어에서 손을 놓은 이후로 베스트라는 단어의 뜻이 바뀐 것일까?

빌리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기쁜 일이지만, 어느새 그들이 베스트라고 할 만한 사이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미국은 어떻게 오게 되신 거예요?”

정신없는 가수들과의 인사를 마치고 따로 조용한 공간으로 나왔다.

“여행차 왔다니깐요.”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죠. 그런데 정말로 여행차 오셨어요? 도준혁 대표님이 그러실 분이 아닌데.”

누굴 일 못 해서 죽은 귀신으로 아나.

나도 여행 좀 다닐 수 있는 거지.

진짜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냥 요즘 영화에 손을 대고 있는데, 제작 역량을 키워야 할 것 같아서 견학차 온 겁니다.”

“오우. 견학. 아주 열정적이시네요. 저는 또 블루문을 데리고 미국에 진출하시려고 그러시나, 했습니다.”

아이돌 미국 진출은 유니브만으로 족하다.

외화벌이 애국은 유니브가 다 해 줄 거고, 우리 멤버들은 한국에서 아폴로와 오순도순 잘 살 것이다.

혹시나 외국에도 아폴로가 생기면 공연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만.

덕질을 할 거면 한국에 직접 오시라.

“아, 그러고 보니. 그때 통화할 적에 〈광란의 질주〉 관련해서 물어보셨죠? 왜 궁금해하시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셨구나. 한국에서도 액션 영화를 찍으시나 보죠?”

아니, 잔잔한 예술 영화다.

물론 대중적인 재미도 가지고 있긴 하겠지만.

적어도 스타리우스를 타고 뉴욕 도심을 질주하는 액션 신은 없을 예정이다.

“대충 비슷합니다. 그나저나 광철 씨가 영화도 하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 그 제작사도 탤런트 홀딩스 식구죠?”

“오해하셨나 보네요. 그건 아닙니다. 그냥 그쪽 총감독이랑 대학교 동기 사이예요.”

“동기요?”

대학교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던 동기가 영화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박광철은 학력이 상당히 높았다.

생활은 한국에서 했어도 미국 아이비리그 예술학도 출신이었는데, 그 학력이 회사 운영하는 데에 아직도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 말이다.

나도 그 학력 덕분에 〈광란의 질주〉 제작사와 만날 가능성을 얻게 되었으니 함께 만세를 외쳐 줄 수 있었다.

“저, 그럼 혹시 촬영 구경 가도 됩니까?”

“그러실래요? 제 일정은 아니긴 한데. 도준혁 대표님이 가신다고 하면 저도 따라가 보죠.”

“아뇨, 그럴 필요는.”

박광철은 부담 갖지 말고 동행하자고 했다.

부담되었다.

***

“아무리 운전석 위치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실례지만 걸어서 갔으면 벌써 도착했겠습니다.”

“그, 그런가요?”

촬영 당일.

화이트 스타리우스 조수석에 앉은 박광철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눈치 한 번 확인하고 속도를 5키로쯤 올렸다.

혹시 몰라 수동모드로 바꾸고도 바로 사이드 브레이크로라도 멈출 수 있는 속도를 유지했는데.

그래, 어떤 미친 차량이 와서 들이받더라도 이 차는 에어백을 터뜨리지 않아 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박광철이라면, 그렇게 목숨이 두 개는 붙은 사람처럼 굴어도 됐다.

“한국에서는 운전 어떻게 했어요?”

“그냥 천천~히 다녔습니다.”

“올 땐 제가 운전하죠.”

나도 액셀 때려 밟을 줄 아는 사람이다.

괜히 그러시라 대답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에 말을 돌려 버렸다.

“그런데 미국 영화 보면 막 헬기 터지고 기차 주저앉고 난리가 나던데. 그런 장면 찍으면 사고 안 나요?”

“요즘은 다 CG로 하죠. 실제로 찍어야 하는 장면이 있을 땐 하나에서 열까지 다 맞춰 본 다음 그대로만 하기 때문에 사고가 나려야 날 수가 없고요.”

조금 비싸다 싶으면 소품에 흠집 하나도 안 내는 게 제작사 사람들이었다.

사람 다칠 일은 더더욱 안 만들겠지.

“참고로 레브잇크 OST는 제작사에서 직접 부탁했습니다. 감독이 친구라고 해서 혹시나 오해하실까 봐. 그나저나 빌리는 언제 다시 한국 가면 되겠습니까? 데뷔 조 관련해서 소식이 전혀 없네요.”

“지금 철저하게 준비 중입니다.”

다들 인생이 걸린 일이라 하루하루 조마조마하겠지만, 그렇다고 데뷔 조 선정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유니브 세 명을 선정하는 데에도 꼬박 며칠이 걸렸다.

오디션을 통해 개인 개별 역량 파악은 애저녁에 끝냈다.

하지만 개인 역량이 특별한 멤버만 모아 놓는다고 좋은 팀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멤버 케미를 철저하게 따져서 진행해야 하는 사안이다.

데뷔 조 활동 6개월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멤버 선정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쏟고 있는 상황이다.

멤버 개인 활동, 〈리부스팅〉 데뷔 조 6개월, 유니브 신곡까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민데 만약 업그레이드를 실패한다면…….

당장 작전은 없지만 일단 호랑이 굴로 들어가 보기는 해야겠지.

“혹시 영화가 만들어지던 도중 엎어지는 경우가 있습니까? 뭐, 사고가 난다든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데에만 해도 정신없는 요즘이다.

지금 떨어진 불은 업그레이드고 말이다.

이걸 제대로 처리해야 앞으로의 그 긴 활동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

“당연히 있죠. 말씀하신 사고도 그렇고, 갑자기 제작비가 없어져도 엎어지죠. 사고가 나서 제작비가 부족할 수도 있겠네요.”

세트장에서 맹꽁이가 발견돼도 촬영이 중지된다.

“그런데 그게 아닌 이상 사고로는 촬영이 엎어지진 않을 것 같은데요. 돈 문제가 얽혀 있지 않으면요.”

하긴.

스타리우스가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그럼 사고로 사람이 죽으면요?”

“그럼…… 그 사람을 대체하겠죠?”

“주연 배우여도요?”

광철의 말문이 문득 멈췄다.

“그럼…… 글쎄요. 그 정도면 아예 엎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곧 촬영장에 도착했다.

진지한 표정의 미국인들이 바쁘게 오가며 촬영을 준비했다.

오늘 찍는 장면에도 포함돼 있는지, 저 멀리 검은 스타리우스 한 대가 발견되었다.

“저 차 한번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네? 저 차요? 저 스타리우스?”

“네. 제가 정비소에서 일한 적 있는데, 사고 나면 큰일이니까 간단하게 검차 좀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광철이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정비소에서 일해 본 적이 없다.

해병대 출신이 아니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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